신빈 김씨 묘비명 愼嬪金氏 墓碑銘

신빈 김씨는 첨지중추부사 휘 원(元)의 따님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어머니는 고씨로 본관은 삭령이다. 영락 4년(1406) 병술 7월 12일에 탄생하시니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덕을 갖추었고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과 다르니 아버지께서 지극히 사랑하시었다.

13세(1418)에 간택되어 궁궐로 들어가 세종장헌대왕을 공경과 정성으로 모시고 내전을 도왔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의 은총이 날로 깊어 선덕 3년(1428. 23세))에 소용이 되고, 7년(1432. 27세)에 숙의, 8년(1433. 28세)에 소의의 품계를 받으셨다. 정통 4년(1439. 34세)에는 귀인이 되셨고, 12년(1447. 42세)에는 신빈(愼嬪)에 책봉되시었다.

세종 승하 후에는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아 자수궁에 거처하였다. 천순 8년(1464) 갑신 가을에 병으로 자리에 누우시니 왕께서 친히 방문하시어 처방을 열람하시어 약재를 갖추어 주셨다. 그해 9월 초 4일에 정실에서 돌아가시니 춘추가 59세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철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장례 모시는 의장을 갖추게 하니 은혜로운 부의(賻儀)가 더하여짐이 있었다. 그해 12월 초6일에 남양부의 치리(治里) 은성원(銀城原) 인좌(寅座)에 예장으로 모셨다.

빈께서는 여섯 형제를 두셨으니 맏아들 증(璔)은 계양군에, 둘째 공(玒)은 의창군에, 셋째 침(琛)은 밀성군에 , 넷째 연(璉)은 익현군에, 다섯째 당(瑭)은 영해군에, 여섯째 거(𤦲)는 담양군에 봉하였다. 계양군과 익현군은 흥운을 잡아 좌익 1등으로 공훈에 책훈되었다.

계양군은 좌의정 서원부원군 한확의 따님과 혼인하여 3남을 두었으니 첫째는 영원군 풍(灃), 둘째는 강남군 융(漋)이며 다음 5남으로 아직 어리다. 의창군은 관찰사 출척사 김수(金脩)의 따님과 혼인하여 1남을 두니 사산군 호(灝)이다. 밀성군은 판한성부사 민승서의 따님과 혼인하여 4남을 낳으니 첫째는 운산군 성(誠), 둘째는 옥손(玉孫), 셋째는 만손(萬孫), 넷째는 춘종(春種)인데 모두 어리다. 익현군은 첨지중추부사 조철산의 따님과 혼인하여 1남을 낳으니 괴산군 지(漬)이다. 영해군은 의정부좌찬성 신윤중의 따님과 혼인하였고 담양군은 혼인 전에 돌아갔다.

아, 슬프다. 정숙한 덕으로 빈위에 발탁되어 군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 다남의 경사를 누리어 간직하셨으니 감히 공경하여 새겨 놓지 않으랴. 명문에 이르기를

상제께서 돌보시와 세종대왕 낳으시니 문왕 같은 착한 자취 후비 같은 자손이라. 아름답다 김씨는 꽃다운 나이 열둘에 내궁에 입시하여 공경과 정성 다하였네. 각별한 은총 받아 은혜 더욱 새로와서 귀인되고 빈으로 책봉 되었네. 임은 가시어 돌아오지 않으니 창오에 구름 깊어 불가에 귀의 했네. 6군을 낳으시니 나랏님의 형제시요 왕손이 번성하니 나라의 경사일세. 아름다운 남양 땅 산 높고 바다 넓어 예 갖추어 장례하니 임금의 은총이로세. 천추의 유실에 이 글이 빛나리라

정헌대부 공조판서 세자우빈객 김수온은 짓고, 위용장군 행충좌무위 섭호군 안혜는 쓰고 아울러 전각까지 하였다. 명나라 성화 원년 을유 5월 20일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