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선조

Title의창군 이야기 12021-07-22 23:30
Writer Level 10
의창군(義昌君) 대하여

 

의창군은 1428년 세종대왕의 9남으로 태여나 1460(세조 6) 에 별세하였다. 휘는 공() 이며 시호는 강도(剛悼) 이다. 1872(고종9) 숭록대부 영종정경( 領宗正卿)으로 추봉되였다.

1452(세조2) 단종 대왕 복위에 연루 되여 도성을 떠나 지리산으로 피신, 은거하여 암자와 사찰을 전전하면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고초가 극심하여 1460(세조 6) 에 병을 얻어 급거 귀경, 그해 10233세로 별세하였다. 당시 신빈(愼嬪) 모후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큰 화를 면하고 장례도 예장(禮葬)으로 치러 왕자로서의 예후에는 결함이 없었으나, 사산군 독자만 두고 일찍 별세하여 후손이 크게 번창하지 못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을 당하여 공의 5세인 담년(聃年) 6세 적()등 종손 부자가 순절하는 비운을 맞으니 차손으로 종계를 이어 가게 되었다.

그후 후손은 벼슬길에 크게 오르지 못하다가 지파 중 공의 7세손 갱생(更生)으로부터 4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도승지 갱생. 이조참판 명하. 7도 관찰사 및 예조참판 사영(思泳). 진사 천기(天紀)등이 계시다. 천기 대에 이르러 경종대왕 위예지시(違豫之時) 노론 4 대신과 뜻을 같이하여 세제 영조 대왕의 대리 청정을 주청하여 이를 실천케 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그 결정이 철회되고 1722(경종 2) 41339세 때 장폐(杖斃) 당하여 문중의 발전이 크게 저해 되었다.

 

의창군 묘소는 본래 경기도 양주군(현 남양주시) 금촌면 진안리 진좌에 예장을 갖추어 모셨다. 그러나 조선 말기 고종 태 황제의 능이 금곡 홍릉으로 정해 지자 인근의 제 묘는 이봉 하라는 국명이 내려 1900( 광무 4)에 수원군 음덕면 원두동 국사봉 독제기 해좌에 사패지지를 받아 이봉 되었다.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 왕조가 망국의 운명에 처하게 되자 사패지지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구 산주와 갈등이 심하여 1946411일 당시 종손 봉희(1907~1972)의 주선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산 25-4에 갑좌경향으로 석의 없이 환봉 되었다. 그후 1986년 파종회 결성을 계기로 제반 석의 ( 묘비. 상석. 장군석. 예장석)을 운반하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 묘역을 확장, 정화하였다. 배위는 연안김씨 덕원군부인(德源郡夫人 : 1429~1482)으로 1872(고종9) 양원군부인(梁源郡夫人) 으로 개봉 되었다. 묘는 합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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