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선조

Title신빈김씨이야기 (5)2021-07-22 23:29
Writer Level 10

신빈 김씨, 3개월 장과 3년 시묘 살이를 받다

 

갑신년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 육형제가 일찍 죽거나 병에 걸린 상태였다. 공이 홀로 여막에 머물렀다. 애통하고 슬퍼하며 예를 다함에 잠시도 게으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했다. 공이 복을 입고 집에 거하니 세조가 특명으로 녹을 하사했다. 복을 마치고도 매양 명절이 되면 휴가를 얻어 묘에 참배했다. 세조가 그 정성과 효성을 가상히 여겼다. <밀성군 신도비>

 

신빈 김씨는 세조 10(1464) 94일 자수궁에서 세상을 등졌다. 병석에 누운 지 20일 만이다. 신빈 김씨는 그 해 추석인 815일 큰아들 계양군이 숨지자 큰 충격을 받았다. 불과 서른여덟 살인 아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정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세조는 신빈 김씨의 치유를 위해 정성을 다했다. 약재를 몸소 점검하여 좋은 재료로 약을 짓게 하고 궁에서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빈 김씨는 한 갑을 다 채우지 못한 59세로 삶을 달리했다. 세종이 천붕(天崩)한 지 14년 만이다. 세종은 재위 32년인 1450217일 영응대군의 거처인 동별궁에서 승하했다. 세종의 곁을 끝까지 지킨 신빈 김씨는 두발을 자르고 비구니 계첩을 받았다. 젖을 먹여 키운 영응대군의 동별궁에도, 친아들인 계양군 등의 집에도 가지 않은 채 여승들이 사는 자수궁에 머물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었다.

신빈 소생들은 세종 승하 후 자수궁에 거처하던 모친을 모시려고 문종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신빈은 속세로의 귀환을 거부했고, 단종 때도 같은 상황은 계속됐다. 세조는 특별히 새 집을 지어 선물하며 아들들과 함께 살도록 했으나 역시 거절했다.

 

신빈 김씨는 세종과 친 자매처럼 다정히 대해 준 소헌왕후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다 이승과 이별했다. 세조는 조회를 중지하는 것으로 애도를 표했고, 예의를 다한 장례를 당부했다. 신빈 김씨는 3개월 뒤인 그 해 126일 남양부에서 다스리는 일은성은 관아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진 인좌 신향한 둔덕에 모셔졌다. 신빈은 숨진 지 3개월 만에 장례를 치렀다. 조선 전기의 왕실 장례는 왕과 왕비는 5개월 장이다. 후궁, 왕자와 공주, 옹주, 왕세자 부부는 3개월 장이다. 후기에는 왕과 왕비도 3개월 장이 많아졌다. 3개월 장에서는 세상 떠난 달을 포함한 셋째 달에 좋은 날을 정해 장례를 치른다. 날로는 짧게는 30일에서 길게는 80일이 넘을 수 있다. 장지는 왕과 왕비는 종친과 대신이 주관하지만 후궁은 친정식구나 환관이 길지를 찾는다.

 

신빈은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담양군 등 6왕자와 2옹주를 낳았다. 신빈이 세상을 등질 때는 밀성군과 병상에 누워있는 영해군만 생존한 상태였다. 이에 밀성군이 홀로 여막에서 3년상을 치렀다. 병이 들었던 영해군은 여막과 집을 오가며 어머니를 기렸다.

 

밀성군이 여막을 짓고 홀로 지극정성을 다했음은 신도비에서 알 수 있다. 김수온이 지은 신도비에 의하면 신빈이 상을 당했을 때 밀성군 형제들은 모두 죽거나 아픈 상태였다. 밀성군은 홀로서 여막에 거처하며 애통해 하면서 어머니에게 예의를 차림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효자로 칭송했고, 기간이 지나 복을 입고 집에 거하니 세조가 특명으로 녹을 하사했다. 밀성군은 3년상을 마친 뒤에도 명절 때는 휴가를 얻어 묘를 참배했다. 이에 대해 세조가 정성과 효성을 가상히 여겼다.

국조보감 을유년(1465) 1월 기사에 밀성군 이침과 영해군 이당은 삼년상을 치르느라고 집에서 지내고 있지만, 모두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 보아 건강이 회복된 영해군도 뒤에는 여막살이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왕자들의 3년상은 세종 때 정해졌다. 세종은 28(1446) 326일 어머니 상 때 1년 상복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 세종은 원경왕후의 승하 때 기년상을 했다. 생존한 상왕 태종을 고려한 상례였다. 이때부터 조선에는 아버지가 생존한 상태의 어머니상은 기년(期年)이 관례가 되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앞으로 모든 왕자는 상복을 3년간 입게 하라초상이 나면 최복(衰服)을 입되, 졸곡(卒哭) 후에는 흰옷으로 3년을 마치게 한다고 방향을 정했다.

이 같은 예에 의해 밀성군은 어머니 여막에서 3년상을 다했다. 밀성군의 효성은 아버지 세종이 모델이 되었다.

 

세종은 어머니 원경왕후의 문병을 위해 밤에 몰래 궁을 빠져 나가기도 했다. 세종 2(1420) 527일 임금이 낙천정에 머무는 원경왕후에게 문안을 했다. 당시 상왕인 태종은 풍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부터 원경왕후가 학질을 앓기 시작했다. 이후 가끔 세종의 행방이 묘연했다. 상왕인 태종도 아들의 동선을 파악하지 못했다. 태종은 아들의 움직임을 열흘 뒤에 알게 된다. 그 해 67일 실록이다. 태종이 문안 온 좌랑 임종선에게 세종을 칭찬하는 대목이다.

내가 그동안 대비와 주상의 간 곳을 몰랐다. 오늘에야 알고 보니 주상이 대비의 학질(瘧疾)을 근심하여 몸소 필부의 행동을 친히 했다. 단마(單馬)로써 시종 두 사람만을 데리고 대비를 모시고 나가 피하여 병 떼기를 꾀하니, 심히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세종의 효성은 신도비에도 표현돼 있다. “원경왕후를 모시고 대궐 밖으로 피하실제, 연을 부축하시며 도보를 따라 노숙하셨다. 항시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 왕후가 승하하시자 음식을 금하셨다. 태종이 강요함에 조금 드셨다.”

 

세종도, 아들인 밀성군도 이승을 떠난 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했다. 세종은 임금의 신분이어서 소헌왕후가 묻힌 헌릉에서 시묘살이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자 신분으로 정사에서 벗어난 밀성군 남양(화성)의 어머니 묘를 지킬 수 있었다. 어머니의 혼이 머무른다고 생각한 묘의 서쪽 아래에 작은 생활공간인 여막(廬幕)을 짓고 짚 베개와 거적을 갖추었다. 두발과 수염을 깎지 않고 매일 어머니 묘를 살피고 때에 맞춰 공양을 했다. 그러나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날씨에서 3년 시묘 살이는 극한의 고통이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무척 버거웠다. 건강을 잃는 경우가 많았고, 경제적으로도 지탱하기 힘든 상황도 있었다. 그래서 3년이 아닌 석 달 시묘 살이가 대부분이었다. 유교정신에 의한 효행의 장려 속에 확산된 시묘 살이는 현실적 어려움 탓에 연산군 때는 1년 상인 단상법(單喪法)을 장려했다.

이처럼 어려운 3년 시묘살이를 왕자인 밀성군이 한 것은 귀감이 될 사안이었다. 그렇기에 세조와 많은 사람이 효행을 칭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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