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선조

Title이조참판 이공묘표(吏曹參判李公墓表)2021-07-2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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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정묘년(1687)에 종신 중 나이 든 사람을 천거하여 은혜를 베풀었다. 이때 이공(李公) 명하(鳴夏) 할아버님의 연세는 74세셨는데, 아들 사영(思永)이 승지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전에는 군수로 계셨는데 통정대부에 올라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부인 성씨는 숙부인에 봉해졌다.

 

이전에 사영은 외지에 벼슬이 제수된 적이 있었는데, 부친이 연로하신 관계로 여러 번 벼슬을 사양하니, 임금께서 사직을 허락하였다. 왕이 직접 부친을 걱정하여 먹을 것과 옷가지를 갖추어 공양하게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 후 2년 후에 임인사화(壬寅士禍)가 일어나 승지는 외진 곳으로 몸을 피했다가 오래지 않아 가까운 곳으로 옮겨와 공의 병환을 돌보게 되었다. 공께서 돌아가신 6년 후에 조정은 다시 바뀌어 승지를 찾아 내간을 제수하였다.

 

다시 조정에 나가자 공께는 이조참판을 증직하여 겸직케 하였고 숙부인은 정부인에 봉해졌다. 성조(聖朝)의 정치가 공이 돌아가신 뒤에 있었으니, 세도의 흥망이 이와 같다.

 

공의 자는 군선(君善, 족보에는 君吾로 표기)인데, 세종의 아드님인 의창군의 가문으로 출계하였다. 의창군 4세 휘 聃齡은 소원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고부군수 휘 수(, 1548년생)를 나으셨는데, 처음 유과(儒科)에 발탁되었으나 일찍 돌아가시어 크게 떨치지는 못하였다. 이분이 공의 대부가 되신다.

아버지 갱생(更生)은 인조반정을 당하여 함께 참여하여 몸소 공을 이루었다. 나라의 큰 재목으로 나주목사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모두 갱생을 어질게 생각하였다. 어머니는 함평이씨 이시고, 외조부는 통례원 상례를 지낸 득원이다.

 

공이 어렸을 때 아버지 목사(牧使)께서 항상 병을 앓으셨다. 공은 유명한 의원을 찾아 지성으로 간병하셨고, 남은 여력을 다하여 학문에 힘쓰셨다. 여러 번 곤란을 겪으면서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탄식하기를 아버지가 계실 적에 급제하지 않은 것으로 기쁘게 여겼는데, 지금 차마 영리를 구하여 벼슬길에 나가겠는가하고 학업을 폐하였다.

 

효종대왕께서 일찍이 선비 중에서 그 뜻이 높아 가히 쓸만한 사람이 있는가하니, 도승지 한필원이 공을 천거하니 곧 태릉 참봉을 맡기셨다. 내직으로 사섬시 봉사, 의영과 직장, 와서 별제, 의금부 도사, 사포서 별제, 사헌부 감찰, 사재감 주부, 통례원 인의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 보은, 의흥 현감, 문의 현령 등을 지냈다. 계축년에 금산군수를 파하고 돌아왔다.

 

공은 거듭 아들을 잃은 슬픔에 병이 되고, 갑인년 당인(黨人)의 용사(用事)를 당하여 문을 닫아걸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공은 만력 갑인 916(1614)에 나시어 숭정 기원 후 기사(1689) 913일에 돌아가시니, 양주 풍양현 도장동 목사공 묘 아래에 장례지냈다.

 

공은 몸이 장대하고 출중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너그러워 사람들과 사귐에 있어 모나지 않았다. 행해야 할 바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였고, 부모를 섬김에 공경을 다하였다. 집에 계실 때도 한 점 나태함이 없었고 묻는 말이 아니면 함부로 말하지도 않았다. 일을 맡아 실행할 때는 오직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하였지만 명예를 탐하는지 않았다. 그래서 공이 떠난 후 백성들은 더욱 공을 그리워하였다. 또한 검소하고 욕심을 내지 않았다. 일찍이 아들이 좋은 말을 산 것을 보고 심히 책망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일이 이와 같았다.

 

이러한 성품이니 집안에 값진 물건이 있을 수 없었다. 아침 저녁, 끼니를 거르는 일도 있었지만, 곡식이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현과 읍에서 벼슬하였지만 돌아올 때는 단지 헤진 옷상자 하나뿐 이었다. 공의 성품이 이와 같이 청렴하였다. 평상시는 화목한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닦았으며 훌륭한 사람들과의 교유로 일관하였다.

 

부인 창령 성씨는 사간을 지낸 여관의 딸이다. 모든 일에 순리로 하고, 자녀와 비복을 다스리되 엄하게 하였다. 공과 같은 해에 나시어 공이 돌아가신 4년 뒤에 돌아가시니 공과 같이 합장하였다.

 

무릇 42녀를 두셨는데, 장남 사영은 강화유수를 지냈고, 사성, 사현, 사원은 모두 요절하였다. 사위는 진사 구문주, 도사 김일경이다. 유수를 지낸 사영은 아들 천기(天紀)를 두었고, 사위는 설서 김만근, 김춘택, 권양성이다. 사성은 아들 백기(伯紀)를 두었고, 사현은 한기(漢紀)를 양자하였다. 사위 문주의 아들 만리는 주서를 지냈다.

 

공은 집에서 효로써 삼갔고, 몸을 지키는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하였으니, 어찌 진실로 선인의 으뜸이 아니겠는가. 비록 몸소 높이 현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장수하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니, 살아 대부의 반열에 오르고, 여기에 보태어 공경의 반열에 오르니 이것을 일러 영예롭다 할 것이다.

하늘이 베풂에 보답한다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함이다. 장남이 훌륭한 신하가 되어 진용되니 장차 그 영화로움의 끝을 알지 못하겠다. 공의 자손들의 역량과 힘이 끝이 없으니, 이에 후손들의 빛남이 끝이 없을 것이다.

 

*1703년 가선대부홍문관부제학 지제교겸경연참찬관 예문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김진규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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