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선조

Title신빈김씨 스토리 (1) 2021-07-22 23:22
Writer Level 10

백마 탄 왕과 신비의 여인

 

고금으로 궁인(宮人)의 세계에는 본래 귀천이 없었다. 노래하던 아이를 궁중에 들인 자도 있고, 일찍이 남을 섬기다가 궁중에 들어온 자도 있었다. 소의(신빈)의 계보는 비록 천하지만 겨우 나이 열셋에 궁중에 들어왔으니 일신의 부덕(婦德)은 바른 것이었다. <세종 1(1439) 127>

 

궁녀가 왕으로부터 성은을 입을 가능성은? 생산직 여직원이 재벌 총수를 만나 결혼할 가능성은? 확률은 비슷하다. 조선 500년사에서 후궁은 100여 명이다. 이중에 간택 후궁은 30여 명이다. 궁녀는 세종 때 100명에 미치지 못했으나 조선후기에는 600명 선까지 는다. 이를 단순화하면 5년에 1명꼴로 궁녀가 후궁으로 신분상승 된다. 1년 동안 근무하는 궁녀는 500 명 선이다. 큰 흐름으로 보면 궁녀가 1년 안에 후궁이 될 확률은 1/2500이다. 이는 재벌 총수가 산업현장의 여성 근로자를 만나 사귄 뒤 결혼할 가능성과 큰 차이가 없다. 궁녀가 후궁이 되는 일은 인생 로또 당첨만큼 어려웠다.

신빈 김씨는 로또 여인이다. 백마 탄 왕을 사로잡은 신데렐라 소녀다. 대궐에 필요 물품을 공급하는 내자시의 여종 출신으로 민족 최고의 성군인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더욱이 소헌왕후로부터도 믿음을 샀고, 친자는 물론 중전 소생의 왕자들로부터도 우대를 받았다. 왕자를 6명이나 낳았고, 직위도 후궁 중 가장 높은 빈까지 올라갔다. 59세까지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산 그녀는 사후에도 영광이 계속된다. 그녀 소생인 밀성군의 후손이 조선 최고 명가를 형성한다. 조선의 왕은 소헌왕후 소생인 세조 후손으로 이어졌고, 전주이씨 핵심 가계는 밀성군파로 내려왔다.

왕자를 중시조로 한 전주이씨는 125계파가 있다. 이중에 문형(대제학) 3명과 정승 6명을 낸 밀성군파는 단연 으뜸으로 인정된다. 조선시대 양반의 상징어는 연리광김(延李光金) 풍홍달서(豊洪達徐). 연안 이씨와 광산 김씨가 대제학을 7명씩 낸 덕분이다. 전주 이씨도 대제학을 7명 배출했다. 전주 이씨에서는 일() 밀성군(6정승 3대제학)-() 덕천군(1정승 3대제학)-() 광평대군(3정승)-() 선성군(2정승)-() 효령대군(1정승)으로 흔히 말한다.

신빈 김씨의 입궁은 정국변화로 이루어졌다.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 뒤 52일 만에 등극했다. 나라에서는 새로운 왕과 왕비를 모실 궁녀를 대규모로 선발했다. 이 때 내자시에서 근무하던 13세 소녀가 발탁이 됐다.

 

소의(昭儀) 김씨(金氏)로 귀인(貴人)을 삼았다. 애당초에 임금이 도승지 김돈(金墩)에게 이르기를, “소의(昭儀)는 본래 내자시(內資寺) 여종()이었으나, 무술년에 내가 처음으로 즉위하였을 때에 모후(母后)께서 뽑아 중궁으로 보내었고, 그때의 나이는 13세였다.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兩宮)을 섬기는 데 오직 근신했다. <세종 21(1439) 127>

 

빼어난 미모에 총명하고 예의 바른 그녀는 내명부를 총괄하던 원경왕후 눈에 띄었다. 원경왕후는 심성이 고운 소녀를 며느리인 소헌왕후의 지밀나인으로 배치했다. 지밀나인은 왕이나 왕비와 생사를 같이하는 최측근이다. 궁마다 20여명이 소속된 지밀나인은 근무 동선은 영의정도 묻지 못한다. 왕과 왕비의 안위, 즉 나라의 운명과 관련된 근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밀나인은 총명하고 믿을만한 궁녀만이 뽑힌다. 후궁 중의 다수는 지밀나인 출신이다. 임금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는 위치 덕분이다. 13세 소녀는 두 살인 수양대군을 업어 키웠다. 당시 소헌왕후는 큰아들인 문종과 갓 태어난 안평대군에게 관심을 더 기울였다. 수양대군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구하며 보챘고, 소녀가 어르고 안아줬다. 훗날 세조가 신빈을 지극하게 예우하고, 신빈 소생 왕자들을 우대한 것은 이 같은 연유가 있다.

 

세종은 소헌왕후를 깊이 사랑했다. 왕은 친정이 멸문한 왕비를 위해 중궁을 쉼 없이 찾았다. 82녀를 둘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중궁을 출입하던 왕에게는 어느 날 성숙해진 여인이 보였다. 신빈 김씨는 총애를 받았고, 세종 9(1427) 8월에 왕자 계양군은 낳았다. 신빈 김씨와 세종은 이때부터 12년간 62녀의 소담스런 열매를 생산했다. 8명의 자녀는 조선시대 후궁으로서는 가장 많은 자손이다. 세종이 그녀를 사랑할 때 소헌왕후는 질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임금이 총애하는 여인에게 더 잘해준다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신빈 김씨도 성을 다해 왕후를 모셨다. 그 결과 자칫 통속적인 삼각관계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소헌왕후가 자신의 막내인 영응대군의 양육을 신빈 김씨에게 위임한 것이다. 신빈 김씨는 계속 직위가 높아졌다. 마침내 왕비 다음의 최고의 직위인 빈으로 승격되었다. 공노비에서 후궁 중 최고인 빈에까지 오른 그녀는 세종이 승하하자 여승이 되었다. 묘적사 중창 등으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며 59세로 삶을 뒤로 했다.

 

(참고 이 신빈김씨 스토리 자료는 신빈 기신제 팸프렛에서 가져옴 (자료를 제공해주신 익현군파종회장 목춘님께 감사드림니다)


Comment

(Enter the auto register prevention c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