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선조

Title<신빈 김씨 스토리를 말하다> 2021-07-22 23:26
Writer Level 10

신빈 김씨의 6왕자를 말하다

 

세조등극 공신 계양군

계양군(14271464)은 자가 현지(顯之)로 신빈 김씨의 1남이다. 계양군의 배위는 좌의정 한확의 딸로 세조의 장남 도원군과는 동서다. 세조와 가까웠고, 세종의 총애가 지극했다. 학문을 즐기고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세조가 즉위하는데 한 몫을 했다. 그 공으로 1455(세조 1) 좌익공신 1등이 된 후로부터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庶務)의 출납을 맡아 신임을 얻었다. 1460(세조 6) 세자가 혼인할 때 가례도감(嘉禮都監) 제조(提調)를 겸했다. 시호는 충소다.

계양군은 영원군 강양군 부림군 방산수 아들을 두었는데 차남 강양군은 막내 숙부 담양군에게 양자로 갔다. 장남 영원군은 아들이 없어 셋째 아우 부림군의 차남 도안군을 양자로 맞이했다. 이 도안군이 문천정과 평양령을 낳아 큰 집을 이루었다. 그리고 부림군의 장남 회안부정은 외아들 덕양부수를 두었고 덕양부수는 말손 희손 두 아들을 두었으나 손자대에서 무후(無后)했다. 또 방산수는 당대에서 후사가 없어 후손이 끊겼다. 그리고 도안군의 차남 평양령도 후손이 없어 결국 문천정 손만이 퍼져 나갔다.

 

단종복위 운동, 의창군

의창군(1428~1460)은 신빈 김씨의 2남이다. 1456(세조 2) 단종 복위에 연루되어 도성을 떠나 지리산으로 피신, 은거하여 암자와 사찰을 전전했다. 1460(세조 6)에 병을 얻어 급거 귀경, 그해 10233세로 별세하였다. 당시 신빈 모후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큰 화는 면하고 장례도 예장(禮葬)으로 치렀다. 사산군 독자만 두고 일찍 별세하여 후손이 크게 번창하지 못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을 당하여 공의 5세 담년(聃年)6세 적() 등 종손 부자가 순절해 차손으로 종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벼슬길에는 크게 오르지 못하다가 지파 중 공의 7세손 갱생(更生)으로부터 4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그들은 도승지 갱생 이조참판 명하(鳴夏) 7도관찰사 및 예조참판 사영(思泳) 진사 천기(天紀) 등이다. 연산(連山)으로 낙향한 원생의 3대손 후기가 진사 행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을 지냈다. 원생의 4대손 덕춘이 행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지낸 공적으로 충남 공주시 유구면과 신풍면 일대에 사패지지를 왕가의 후예답게 유지했다. 19193·1운동 당시에는 원생의 10대손 우상이 고종태황제 인산에 참여하여 학생들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전수받아 호서지방에서는 선봉으로 314일에 유구만세운동을 선도해서 옥고를 치렀다.

 

조선 최고 명가 이룬 밀성군

밀성군(1430~1479)은 신빈 김씨의 3남이다. 세조가 등극하기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즉위 후에는 정국을 자문하는 등 국정에 참여하였다. 1467(세조 13)에 의금부 도위관을 지냈다. 예종 때에는 임관을 마다 하였고, 성종은 공의 많은 공을 인정하여 2등 공신에 책훈하였다. 밀성군의 장남 운산군은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옹립한 중종반정에 참여하였다.

밀성군 6대손인 경여는 병자호란 때 강화를 극력 반대하며 도성사수를 진언했다.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는 등 척화파로서 두 차례의 억류와 유배 및 강등을 당하는 등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도 북벌계획에 힘을 다하였다.

숙종 때에 노론4대가인 이명은 기사사화 정쟁으로 유배와 복직의 세월을 거치면서 한시대의 정국을 이끌었다. 노론4대신인 건명 또한 정국을 이끌다 유배되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밀성군 자손들은 광해군의 실정과 인조반정, 연산군의 음학과 중종반정, 숙종 때의 격랑 등에서 정국을 이끌면서 종묘사직을 수호했다. 또한 일제치하에서는 창호 건호 중각 등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왕권강화 힘쓴 익현군

익현군(1431~1463)은 신빈 김씨의 4남이다. 휘는 곤()이며 자는 광지(光之),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범상치 않아 학문이 출중하니, 세종이 총애하여 1437(세종 19) 7세에 익현군에 봉하였다. 1455년 세조 등극 때 계양군과 같이 공을 세워 공신열에 들었다. 수충위사 동덕 좌익 1등공신이 되었으며, 임금은 `단서철권(丹書鐵券)'`토전장획(土田臧獲)'을 주고 총애하였다. 배위는 평양 조씨로 첨지중추원사 찬성 철산의 딸로 김제군부인에 봉해졌고, 11녀를 두었다. 아들 지는 괴산군에 봉해졌다.

괴산군이 후사가 없었으나 김제군부인의 회갑 때에 의창군 공의 손 사산군의 차남 해를 입계하여 화산군에 봉했다. 화산군은 사직령 송호의 딸인 여흥현부인과의 사이에 31녀를 두었다. 장남은 성안정 정이며 차남은 달성도정 제이고, 3남은 풍성령 지이다.

춘추 33세로 요절했다. 세조가 애통해하며 식사를 폐하고 3일간 조회를 폐하였다. 부의와 예전을 예에 넘치게 하였다. 묘역 근처 많은 사패지지와 불천지위 사우를 중건하여 하사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4리 지사동에 예장하였다.


큰 마음의 영해군

영해군(1435~1477)은 신빈 김씨의 5남이다. 어렸을 때부터 너그러웠다. 자라면서는 덕의와 절의가 있어 스승과 공부할 때는 화려함을 기뻐하지 않았다. 후손들에게 관인대도(寬仁大道)와 검소질박(儉素質朴)의 본을 보여 주었다. 평산 신씨를 부인으로 맞아 영춘군 길안도정 2남과 딸 하나를 두었다. 43세에 별세하였으며 나라에서는 안도(安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서울 도봉산 무수동에 있고 전북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소덕사(昭德祠)에 위패를 모셨다. 소덕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55일 기신제를 지내고 있다. 사당명은 공의 관계(官階)가 소덕대부(昭德大夫)이기 때문에 소덕사라고 일컫게 되었다.

장남 영춘군은 부친의 인덕을 바탕으로 효행이 지극해 왕실의 은총을 받았다. 영춘군의 차남 강녕군은 알뜰하게 가꿔진 꽃밭과 정결한 집을 가졌었는데 연산군의 내폐(內嬖)가 이 집을 탐내어 빼앗고자 했다. 그러나 강녕군은 불응하자 내폐의 고자질로 연산군은 크게 노해 주인과 가노를 붙잡아 가두고 문초했다. 이런 연유로 강녕군 부자와 여러 형제는 남해 섬으로 귀양살이를 갔다. 중종반정으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중종은 특별히 정국원종공신으로 공훈록과 비문에 그 사적을 표기케 하고 삼강행실록에도 기록토록 했다.

 


못다 핀 꽃, 담양군

담양군(1439~1450)은 신빈 김씨의 6남이다. 1450(세종 32)년에 부왕이 승하하였을 때에 공이 몸부림치며 애통해 함이 성인에 못지 않더니 너무 슬퍼해서 몸을 상하여 일찍 세상을 떠났다. 문종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장지(葬地)를 명하여 내려주었다. 세조 때에는 형인 계양군의 차남 강양군으로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 파평산 서쪽 기슭 을좌이다. 비갈이 있고 전면에 부조묘가 있으며 태봉은 경북 성주 선석산에 있다. 공의 계자인 강양군의 휘는 숙이다. 세조 때에 특별히 금헌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초수는 정()이었으며 흥록대부이다.

강양군은 54녀를 두었다. 현부인 양천 허씨는 안악군수 준의 딸로 후사가 없었다. 배위 대원 김씨는 아들 셋을 낳았다. 장남은 영평정 보이며 가선대부이다. 차남은 희안군 집으로 초수는 창선대부였으나 현록대부로 증직되었다. 3남은 예안군 헌으로 정의대부이다. 또 한분의 배위께서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양평부수 굉이고, 차남은 함창부수 함이다. 공의 4세손 순천군 관은 창선대부 정이다. 종반공자(宗班公子)로 충효정려를 받았으며 그의 행적은 해동명신록에 올라 있다. 5세손 완창부원군 성중은 임진왜란 때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호성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영의정 완창부원군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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