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선조

Title신빈김씨이야기 (4)2021-07-22 23:28
Writer Level 10
왕실 여인의 미스터리 3가지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열세 살 때 세종대왕의 왕비 처소(지밀나인)에서 일하셨다. 매우 조심하며 왕후를 삼가 공경하셨다. 왕후로부터 인정 받으셨다. 후궁이 되어서는 세종의 예우하시는 은혜가 날로 커졌다. <신빈 김씨 묘비명>

 

신빈 김씨 소생의 6왕자 후손들은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다. 세 가지 의문점 때문이다. 하나는 신빈의 본적이고, 또 하나는 신빈 김씨의 친정 아버지 이름이고, 마지막으로 출신 성분이다.

 

먼저, 신빈 김씨의 본적은 청주와 청풍이 엇갈린다. 여섯 왕자 중 계양군 의창군 익현군 영해군 담양군 파보에는 본적이 청주로 게재돼 있다. 그런데 유독 밀성군 족보에는 청풍으로 나온다. 신빈의 본적은 판서 김수온이 쓴 묘비에 나온다. 경기도 화성시청 옆 신빈의 묘 동남쪽에 세워진 묘비는 세월이 흘러 많이 마모됐다. 청주와 청풍 부분을 해독할 수 없는 상태다. 묘비의 앞부분에 본적이 새겨져 있다.

 

신빈 김씨 묘비명(愼嬪 金氏 墓碑銘) 빈첨지중추원사원지녀(嬪僉知中樞院事元之女) 적청주(籍淸州).’


다섯 왕자 후손 관련 문헌에는 적청주(籍淸州)인데 비해 밀성군 후손 관련 문헌에는 적청풍(籍淸風)이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고문인 이목춘 전 육군파 회장은 수년에 걸쳐 청주 김씨 족보와 청풍 김씨 족보를 거듭 열람했다. 또 비문 사진을 정밀 판독했다. 그 결과 청주 김씨 족보에서 첨지중추원사 김원지(金元之)를 확인했다. 그의 후손이 절손되었음도 알았다. 반면 청풍 김씨 족보에서는 세종 시대에 첨지중추원사를 지낸 같은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옛 자료 사진에서도 흐릿하지만 청풍 보다는 청주에 가깝다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조선 태조로부터 숙종 때까지 왕손 65인의 행적을 모은 종반행적(宗班行蹟)에 신빈 김씨의 본적이 청주로 표현돼 있다. 종반행적은 숙종 7(1681)에 편찬되고 영조 초년에 보완되었다. 책의 하권 조비빈행적(朝妃嬪行蹟)의 신빈김씨묘비명(愼嬪金氏墓碑銘) 도입 부분이다. ‘빈첨지중추원사휘원지녀적청주모고씨적삭녕(嬪僉知中樞院事諱元之女籍淸州母高氏籍朔寧).’ 이로 볼 때 신빈 김씨의 본적은 청주가 확실시 된다. 밀성군 족보의 청풍은 처음 인쇄 때 잘못된 탓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음, 신빈 김씨의 친정아버지 이름이다. 지금까지 공공기관 학자나 후손들도 김원으로 인식했다. 이는 비문의 글을 학계에 처음 소개한 학예사의 해석 영향이 크다. 학예사는 嬪僉知中樞院事諱元之女籍淸州첨지중추원사 김원의 딸로 본적을 청주라고 풀이했다. 휘원지녀(諱元之女)에서 휘는 이름이다. 이름을 으로 보고 지()‘~로 해석한 것이다. 원의 딸로 생각했다.

 

이 해석은 이후 많은 문헌에 인용됐다. 실제로 왕조실록에도 이름이 김원으로 나온다. 문종은 즉위년(1450) 76일 인사에서 그를 첨지중추원사로 발령했다. 실록에는 김원 병첨지중추원사(金元 竝僉知中樞院事) 원신빈지부(元愼嬪之父) 특명병조(特命兵曹) 물령입직(勿令入直) 순작수반(巡綽隨班)’으로 표현됐다.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김원을 첨지중추원사에 임명한다. 원은 신빈의 아버지다. 병조에 명하여 입직(入直)은 시키지 말고 야간순찰로 조회를 대신하게 했다.’

 

청장관전서에도 신빈의 아버지를 김원으로 표기했다. ‘김원녀(金元女) 세종조신빈야(世宗朝愼嬪也) 생계양군증(生桂陽君璔) 의창군공(義昌君玒) 밀성군침(密城君琛) 익현군곤(翼峴君璭) 영해군당(寧海君瑭) 담양군차육왕자야(潭陽君此六王子也)’이다. 김원의 딸은 세종의 신빈이었는데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담양군 등 6형제를 낳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청주 김씨 족보와 청풍 김씨 족보에는 세종과 문종 시대에 첨지중추원사를 지낸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청주 김씨 족보에 김원지(金元之)가 있고, 벼슬도 첨지중추원사다. 그 형제 항렬의 돌림자는 지(). 따라서 실록의 김원과 청주 김씨의 김원지는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족보에는 돌림자를 넣어 원지로 하고, 관직 이름으로는 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빈 김씨의 출신 성분이다. 세종실록에는 내자시 여종 출신으로 나온다. 세종은 21(1439) 127일 그녀를 소의에서 귀인으로 승진시킬 뜻을 밝힌다. 임금이 도승지 김돈에게 한 말이다. ‘소의 본내자시비야(昭儀, 本內資寺婢也) 세재무술(歲在戊戌) 여초즉위(予初卽位) 모후선입중궁(母后選入中宮) 시년십삼세(時年十三歲).’ “소의(신빈)는 본래 내자시의 종이었다. 내가 무술년에 즉위할 때 어머니 원경왕후가 선발해 중궁에 보내셨다. 그때 그녀는 13세였다.” 내자시의 여종인 신빈이 궁녀 충원 때 원경왕후의 눈에 들어 소헌왕후의 중궁전 궁녀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청주 김씨의 족보에 김원지의 아내가 하동 정씨(河東 鄭氏) 점과 관련성을 따질 수 있다. 신빈의 어머니인 삭녕 고씨가 김원지의 계비나 측실일 가능성이다.

 

그런데 밀성군의 8대손 이이명은 소재집에 선조 밀성군(先祖密城君) 세종대왕 제13(世宗大王第十三子) 모신빈김씨(母愼嬪金氏) 이사족 선입후궁(以士族 選入後宮)’으로 표현했다. 밀성군의 어머니인 신빈 김씨는 양반가문의 딸로 선택된 입궁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쉼 없이 내려왔는데 신빈묘비문의 한 구절에서 더욱 탄력을 받았다. 빈생유의덕거지이상중추특종애년십삽세입내사(嬪生有懿德擧止異常中樞特鍾愛年十三選入內事)이다. ‘신빈은 자라면서 아름다움과 덕이 넘치고 남다른 행동으로 첨지중추원사인 아버지로부터 특별히 사랑받았다. 13세에 선택돼 중궁전에 들어왔다.’

이 문장에서 핵심은 연십삼 선입내사(年十三選入內事). 내사(內事)는 중궁전, 즉 소헌왕후 내전이다. 열세 살에 선택돼 중궁전에 배치됐다는 의미다. 궁녀 경험이 없는 공노비가 하루아침에 왕후의 지밀나인이 되는 것은 통념에서 벗어난다. 단계를 밟지 않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특별한 사유 가능성을 암시한다. 비문에서도 선택됐다는 표현을 했다. 경험이 없음에도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은 쇠락한 사족일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문헌이나 기록이 없어 확증을 하지 못하고 이야기로만 전해져 온 것이다.

 

숙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이명은 이 글을 32세에 지었다.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그는 기사사화(1689)로 영해에 유배된 상태였다.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조상들에 대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그의 사족 주장은 선조에 대한 선양 와전에서 비롯된 가능성이 있다. 나라의 공식기록인 세종실록에 내자시 여종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참고할 점은 있다. 신빈의 아버지가 첨지중추원사에 임명됐을 때 실록에는 출신 성분에 대한 부연 설명이 없다. 딸이 노비면 아버지도 천민일 수 있다. 천민이 고위관료가 되었으면 설명이 따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신빈의 아버지는 족보가 분명하고, 어머니의 본적도 확실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뿌리가 있던 집안이 일시적으로 가세가 기울었을 가능성도 있다.


Comment

(Enter the auto register prevention code)